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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

정명석 해외 도피, 과연 사실인가? 정명석 해외 도피, 과연 사실인가 정명석 목사의 해외 도피는 사실이 아닙니다. 정명석 목사는 1999년 이전부터 한국에서만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ᅠ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를 해 왔고 그 말대로 1999년 1월, 해외로 출국했습니다.ᅠ 아래의 내용은ᅠ정명석 목사의 설교 중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 1998년 12월까지 월명동 돌 조경을 다 쌓고, 마지막으로 행사하고, 하루도 못 쉬고 한해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유럽으로 떠나자" 하여 떠났습니다. ...... 주님은 나를 통해 21년 동안 한국을 중심으로 신앙의 새 역사를 펴나가게 하셨습니다.ᅠ 그러다가 1999년부터는 유럽에 나가서 시대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럽, 세계 각국의 제자들을 모아 평화 대회를 하게 하셨습니.. 더보기
생명은 생명으로 - 월남에서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7] 랜턴을 머리 쪽에 대고 머리를 툭툭 치니 초긴장하여 고개를 드는데 눈만 반짝였다. 적을 보고 담대한 것이 전쟁터에서 군인의 기본 정신이기에 담대했다. 월남말로 “여 따이렝” 하며 손들라고 소리를 질렀다. 적이 손을 들고 쭈그리고 앉았다. 구둣발로 옆구리를 툭툭 차면서 겁을 주었다.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으로는 랜턴을 비추면서 몸수색을 하다, 약간 기미가 이상해 먼저 적의 양손을 뒤로 결박하여 꽁꽁 묶어버렸다. 적들은 사생결단하는 시간이라 별 모사를 다 쓴다. 다 죽은 척하다 자기 품속에 가지고 다니는 시퍼런 대검으로 쿡 쑤시는 수도 있다. 적을 잡아도 적을 죽일 때까지는 1:1일 때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몸을 수색하니 수류탄이 나왔다. 그리고 탄띠, 즉 허리띠에는 권총집만이 보였다. 총은 어디.. 더보기
생명은 생명으로 - 월남에서1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6]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험난했다고 다들 말한다. 나 역시도 나의 삶의 길이 고달팠고 괴로웠으며 또 다시 걷고 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걸으려 해도 불가능한 험난한 삶의 길이었다. 한 때는 너무 어려워서 삶을 포기하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의식주 문제와 환경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음의 좌절이 문제였다. 따가운 태양 빛이 얼굴이 그을리도록 내리쬐고, 먹장구름에 장대같은 비가 쏟아진다. 67년 4월, 나의 고향 하늘이 아니라 이국 땅의 전선의 하늘이다. 말로만 듣던 피비린내, 또 말로만 듣던 전투, 전쟁터, 말로만 듣던 총격전…이제는 내가 직접 주인공이 되어 그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신음과 고통, 그리고 삶의 소망, 생명의 가치성, 죽음, 인생의 허무, 신의 의지 등과 모두 한자리에서.. 더보기
꿈과 현실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5] 사람은 모두 저마다 꿈과 현실이 있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 꿈과 현실이 있다. 하지만 꿈은 많아도 그것을 현실화 시키기는 쉽지 않다. 흔히 그 꿈들이 망상이나 환상에서 끝나고 마는 일이 너무 많다. 지금 내가 하는 꿈 이야기는 잠꼬대 꿈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의 싱싱한 소망과 생각의 꿈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는 꿈이 많고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 꿈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며 살아보았지만 그 꿈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꿈을 이루기는커녕 눈물의 산을 넘게 되고, 눈물의 강을 건너게 되었으며, 젊은 날 홀로 긴 인생의 밤길을 걸으니, 소쩍새의 슬픈 울음 소리가 내 노래가 되고, 내 삶도 그 새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소쩍새 울음 소리를.. 더보기
내 생각과 다른 하늘의 생각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4] 칠흑같이 캄캄한 밤길이었다. 새벽 2시, 발걸음을 재촉하며 성황당 고갯길을 하늘과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의 발길이 아직도 끊이지 않은 셈이다. 길의 좌우에는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심은 나무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노방전도를 하고 오는 길은 너무나도 벅찬 발길이다. 돌아오는 길에 내 고향 성황당 고개를 올라오면 항상 나는 한잠 자고픈 마음이 든다. 아마 내 집이 시야에 들어오니 포근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캄캄한 끝에 빗줄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우산도 없는데 어둠 속에 비가 꽤 쏟아졌다. 다 왔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빨리 뛰고 싶지만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라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늘상 다니던 길이라 짐작으로 논두렁길까지 더듬어 왔다. 그 때 앞을 못 보는 봉사가 얼마나 불.. 더보기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2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3] 그 오랫동안 체질을 길들여온 달동네 음식이 지금도 건강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요즈음 같이 병이 많은 세상을 생각하면 노이로제 걸려 또 병을 얻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올 줄 알고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해주신 것이었다. 가난해서 환타, 콜라, 사이다 못 먹고 얼음과자 못 먹어, 언젠가 잘살면 실컷 먹으면서 살겠다고 혓바닥 깨물면서 희망에 가득차 이를 물고 살던 그 때. 아, 오늘에 와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도 건강 때문에 안 먹는 것은 그만큼 연단해왔기 때문에 아예 끊는 것도 쉬웠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지금도 싣고 가는 차만 보아도 순간 마음에 시험이 드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실컷 먹었더라면 지금쯤 내 나이의 남들처럼 골골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하나님께 너무 감격 감사할 .. 더보기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1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2] 6월 폭염 6월 폭염, 땡볕 땅에서 훈김이 후끈거리고 섭씨 36~38도가 넘는 한 더위다. 보리베기 그 뜨거운 몸부림치던 날들, 날마다 땀으로 목욕을 해야 하는 고달픈 달동네 삶, 아마도 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고, 읽을지라도 그 때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나와 같이 그 환경을 겪은 내 형제들, 그리고 고달픈 그 길을 걷는 자는 이 글을 읽으며 너무도 그 속을 잘 알 것이다. 찌는 듯한 여름 보리베기 타작, 한 술 보리밥에 반찬이라야 고추장 하나, 할 수 없이 마늘밭에 가서 마늘을 한 주먹씩 마구 뽑아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 이렇게 몸부림쳐도 꽁당보리밥 한 술에 고추장, 마늘뿐이냐. 인생 살기 너무 힘드는구나. 살자니 청춘이고, 죽자니 너무 내 인생이 억울하구나.” 꽁당보리.. 더보기
너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라2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1] 1970년대 당시에는 우리집도 내가 양식을 꼭 팔아주어야 할 입장이었다. 다음에 가서는 우리 어머니 옷을 꼭 사주어야 할 입장이었는데, 월남에 두 번째 갈 때 마음먹은 것 중에 하나가 우리 어머니 옷을 사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에게 욕을 얻어먹을망정 어머니 옷을 한 벌 사드리기로 했는데 그 돈에서 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이것저것 조금씩 떼다보면 교회로는 반밖에 못 가지고 갈 것 같았다. 또 동생들이나 형들도 나를 위해 기도했다고 하니까 조금씩 떼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것저것 다 접고 돈을 돌돌 말아 묶어서 교회에 갖다주었다. 돈 뭉치가 너무 커서 헌금통에는 안 들어갔다. 그래서 어디에 놓을까 연구를 하다가 강대상에 얹어놓았다. 그것을 가지고 석막교회를 지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 형들은 .. 더보기